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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海無涯,天涯若比鄰,三人行,必有我師。

이도영[李道榮·1884∼1934]

한국 최초의 만화가 – 현대만화의 시작은 1908년 7월에 경성일보사가 발간한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의 삽화로 보고 있으며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게재된 이도영의 삽화는 최초의 신문만화가 된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면소(芇巢)·벽허자(碧虛子). 이름은 도영(鞱頴)으로 쓰기도 하였다. 서울태생으로 18세 때에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업하였다.

특히, 안중식의 화풍을 주로 이어받아 인물·영모(翎毛)·기명절지(器皿折枝)의 화제(畫題)에서 온건하고 자유로운 필력을 발휘하였다. 1911년에 은사 조석진과 안중식이 중심적 교수진이 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되자 그림 전공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8년에는 동연배의 화우였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 출신 고희동(高羲東)이 앞장서서 서화협회(書畫協會) 조직에 나서자 조석진과 안중식을 위시한 13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고희동과 더불어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21년에 첫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를 개최함과 동시에 『서화협회회보(書畫協會會報)』에 「동양화의 연원(淵源)」과 「동양화의 강구(講究)」를 연재물로 집필하였고, 1923년에는 미술학교를 목표한 3년 수업과정의 서화학원(書畫學院)을 서화협회가 개설하면서 동양화부 지도를 맡았다.

그 밖에 1922년부터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대규모로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원을 수차 역임하였다. 그러한 많은 화단 활동에 비하여 정작 그의 그림은 명성에 부합되는 높은 경지의 특질성이나 개성적인 작풍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전해지는 역작도 많지 않다.

1909년은 일제강점의 전야로 암울한 시기였다. 한자투성이의 국한문 혼용이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무척 적었던 시절이다. 신문이 일반 대중에게는 어렵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만화가 등장하면서 독자들은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뜬다. 만화를 통해 신문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하면서 당시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민의를 전하는 수단으로서 풍자적이면서도 신랄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친일 관료를 규탄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다뤘다. 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는 계몽적인 내용도 많이 소개했다.

대한민보 1910년 4월 10일자에 배우가 노래하는 광경이라는 뜻의 ‘배우창곡도(俳優唱曲圖)’가 실렸다. 새타령의 후렴구인 ‘뻐꾹’을 나라를 되찾자는 의미인 ‘복국(復國)’으로 바꾸어 ‘이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저 산으로 가며 복국, 복국, 복복국’이라 하며 국권을 되찾자고 얘기했다.

대한민보는 활자를 모아서 제작하는 활판인쇄 방식으로 찍었지만 만화가 들어가는 부분은 공백으로 두었다가 목판에 만화를 새겨 넣어 만들었다. 대한민보의 발행부수가 6200부 정도였다니 노고가 짐작된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발행부수는 각각 3000부였으니 대한민보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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